이숙 (1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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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숙은 1626년에 태어나 1688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심양에 포로로 잡혔다가 귀국했으며, 165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현종과 숙종 시대를 거치며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특히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던 시기에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이조판서, 형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했으며, 당쟁 속에서도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았다.
이숙은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으로 심양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했다가 귀국했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657년(효종 8) 설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남인 오백령의 딸은 서인 노론계 중진이자 송시열의 제자인 이숙과 혼인하였다. 이 혼인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백령의 증손자는 오시수인데, 이숙은 오시수와도 가족관계를 형성하였다.
2. 생애
현종 즉위 후 봉교를 시작으로 통진현감, 지평, 호남 진휼어사, 수찬, 정언, 양남어사, 부수찬, 이조좌랑, 이조정랑, 응교, 보덕, 집의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진주사 벌금 사건으로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어 부교리로 복직했다. 이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 충청도관찰사, 우부승지, 경상도관찰사, 우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했으나, 송시열의 제자로서 서인 산당을 대변하다 현종의 노여움을 사 김만중과 함께 삭탈관직 및 문외출송되었다.
숙종 즉위 후 문외출송에서 풀려나 조정에 복귀했으나, 다시 명천에 귀양을 갔다. 경신환국 이후 전라도관찰사로 등용되었고, 강화유수, 대사헌,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될 때 노론의 편에 섰다. 이후 예조판서, 좌참찬, 강화유수, 우참찬,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1688년에 별세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 때 심양에 끌려가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 귀국,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급제했다.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657년(효종 8) 설서가 되면서 관직에 진출했다.
2. 2. 현종 시대
1659년 (효종 10년), 현종 즉위 후 봉교가 되었으며 1661년에는 통진현감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지평에 제수되어 내직으로 돌아왔고 1662년, 호남 진휼어사가 되어 민생을 돌봤으며 이후 다시 수찬을 거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후 다시 양남어사로 나갔다가 곧 수찬으로 돌아왔다. 그 뒤 부수찬, 수찬 등을 거쳐 1663년에는 이조좌랑으로 임명되었다. 1666년에는 이조정랑으로 승진했고 이후 응교를 거쳐 보덕이 되었다. 1667년에는 집의가 되었다. 그러나 진주사 벌금 사건 때 김징, 조성보 등 8명의 간관들과 함께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진주사였던 허적과 남용익의 파직과 체직을 요청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부처되었다. 1668년에 방면되면서 부교리로 복직되었다. 1669년에 당상관에 올라 광주부윤이 되었고 곧 충청도관찰사로 승진했다. 1670년에 내직으로 돌아와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1671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우승지로 내직에 돌아와 현종을 보필했다. 그러나 곧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1673년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송시열의 제자로써 서인 산당을 대변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다시 사게 되면서 김만중과 함께 삭탈관직되고 문외출송 되었다.
2. 3. 숙종 시대
1675년 문외출송에서 풀려났으며, 1676년에 서용되면서 조정에 다시 진출했다. 하지만 1679년에 다시 명천에 귀양갔다. 곧 방면되었고 경신환국 이후인 1680년에 다시 등용되면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강화유수,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인현왕후가 왕비로 봉해진 1681년에는 병조판서로 옮겼고 곧 이조판서로 옮겼다. 1682년에는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김수흥의 사돈으로서 노론의 편에 서서 노론계 중진이 되었다. 1683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입각했다. 예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684년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다시 우참찬으로 내직에 돌아와 대사헌이 되었다. 1685년 형조판서로 입각했고 곧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686년 다시 대사헌을 거쳐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687년 한성부판윤, 대사헌, 좌참찬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정승으로 발탁되어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1688년에 별세했다.
3. 오시수, 오백령 가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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